2022년 2월 1일, 시리아와의 경기를 승리로 마무리하며 대한민국은 ‘10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 성공이라는 금자탑을 쌓아 올리는 데 성공했다. 물론 언제나 그랬듯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대한민국 축구에서 독이 든 성배라는 소리까지 듣던 국가대표팀 지휘봉은 벤투 감독에게도 엄격하게 작용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2018년 이후로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던 벤투호는 대한민국 축구에서 정말 찾아보기 힘든 ‘한 명의 감독으로 월드컵까지 진출이라는 어떻게 보면 끈기만 있으면 될 것 같으면서도 그동안 하지 못했던 목표에 거의 다 오는 데 성공했다. 그럼 현재 시점에서, 벤투호는 카타르 월드컵이라는 거대한 무대에 오를 준비를 얼마나 마쳤을까?

 

준수한 예선 성적을 거둔 파울루 벤투 감독

 

우선 그동안의 최종예선 잔혹사를 생각해보면, 벤투호는 최종예선을 정말 순탄하게 통과한 편에 속한다. 브라질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대한민국은 최종예선용 감독 따로월드컵용 감독 따로라는 말도 안 되는 과오를 저질렀으며, 러시아 월드컵을 준비하면서도 소방수 역할로 신태용 감독을 불러서 남은 최종예선을 간신히 마쳐야 했다. 그에 비하면 벤투호는 최종예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한 번도 선제골을 허용하지 않은 채 월드컵 직행 티켓을 따냈으며, 벤투 감독 본인의 철학 또한 방향성이 확고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는 상당히 긍정적인 포인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덧붙여, 최종예선을 포함한 부임 기간의 월드컵 본선에 오를 만한 전력을 가진 팀들을 상대로 한 전적도 좋다. 벤투호는 코스타리카칠레, 우루과이, 호주, 콜롬비아, 이란, 브라질, 일본, 멕시코 등 월드컵 본선에는 자주 진출하는 수준의 국가들과 붙은 전적에서, 브라질에게 당한 3:0 패배, 멕시코에게 당한 2:3 패배, 일본에게 당한 3:0 패배를 제외하면 패배하지 않았다. 특히 매번 대한민국의 발목을 잡는 숙명의 라이벌이라고 꼽히던 이란과의 경기에서 한 번도 지지 않았다는 점은 나름 고무적인 성과이다. 이처럼 벤투호는 월드컵 본선에 오를 만한 전력을 가진 팀들과의 경기도 적지 않게 치렀음에도 불구, 총 41경기 27승 10무 4승률 65.85%라는 준수한 성적을 보이고 있다.

 

벤투 체제에서 이란과의 무승부를 거둔 경기에서 손흥민의 선제골 (사진 출처: KFA)

 

그리고 벤투 감독 본인의 지향점 또한 뚜렷하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경기 외적으로는 체계적인 프로그램과 선수단 운영 방식의 정립으로 새바람을 불러왔고, 경기 내적으로는 기성용의 은퇴 이후 3선의 안정화가 필요했던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상황에서 정우영과 황인범 등의 자원들을 통하여 준수하게 대체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동시에 3선의 호흡과 밸런스를 활용하여 후방에서부터 골키퍼까지 참여시킨 채 차근차근 진행시키는 빌드업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너무 안일하다고 지적받았던 경기 운영 방식 또한 투톱 실험, 손흥민의 공격형 미드필더 배치 등 적지 않게 변화점을 주려고 했으며, 결과적으로 현재 벤투 감독의 전술은 유연함과 세밀함을 동시에 노리며 발전하는 중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점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감독 부임부터 최종예선을 통과하는 과정에 있어서 어느 정도 득을 봤던 벤투 감독의 방향성의 확고함 선수 활용과 관련하여 대한민국이 본래부터 추구하던 스타일과 안 맞다”, “너무 틀에 갇혀서 축구를 하려는 느낌이다등의 비판을 받았으며, “고집이 너무 세다”, “본인 스타일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하다라는 비판적 여론이 형성된 적도 있었다. 실제로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이후 차세대 대한민국의 골키퍼 자리는 조현우가 맞다라는 여론이 형성된 상태에서, 김승규 골키퍼를 더 선호하는 모습을 보이며 팬들에게 질타를 받기도 했다.

 

팬들의 지지를 받는 조현우와 벤투의 철학에 더 적합한 김승규

 

물론 이는 선수 기용과 전술에 관하여 자신의 철학을 지키며 보수적인 성향을 내비치는 부분이 강하다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벤투 감독의 주요 스쿼드에서 풀백 자원 문제는 아직까지도 확실하게 고쳐졌다고 말하기 힘든 상황이다. 왼쪽 풀백의 김진수, 홍철. 그리고 오른쪽 풀백의 이용, 김태환이들의 기량이 주전감을 확실하게 정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일관적이지는 않으며, 이는 오랜 시간 한국 축구의 고질병으로 지적되어 온 부분이기도 하다. 특히나 현대 축구에서 풀백의 역할과 존재감은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중요하며, 이는 월드컵에서 최대한 높은 곳까지 올라가기 위하여 벤투 감독이 답안을 찾아야 하는 부분이다.

 

어찌 됐든 월드컵 본선 티켓은 손에 쥐었고, 시간은 1년도 안 남았다. 과연 벤투호는 그동안 추구했던 방향성의 결과를 월드컵이라는 무대에서 어떻게 선보일 수 있을까. 그것은 지금까지 쌓아온 것, 그리고 남은 시간 동안 갈구해야 할 해답에 따라 달려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종목을 불문하고 과거에 훌륭했던 선수를 현재 최고의 선수들과 비교하며 평가하거나 과거의 선수가 현재 활약하면 어떤 활약을 보여줄지 가정하는 것은 팬들에게 큰 재미를 준다. 다만 스포츠 자체가 순수하게 종목 내적인 부분뿐만이 아니라 종목 외적인 부분도 많이 가미될 수밖에 없으며 축구도 예외는 아니다.

 

이 때문에 축구사에서도 특유의 종목 외적인 부분에서 혜택을 본 자도 있으며, 반대로 불이익을 본 자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이 종목 외적인 부분은 과거와 현재의 기술 차이, 장비 차이 등으로도 해석할 수 있으나 이 글에서는 국적과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더욱 빛을 보지 못한, 혹은 21세기에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면 더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을 것 같았던 선수들을 알아보려고 한다.

첫 번째로 언급할 인물은 월드컵에 나가보지 못한 선수들 중 가히 역대 최고봉으로 뽑히는 선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다. 축구에 관심이 많은 팬들은 알고 있듯이, 디 스테파노는 정말 옛날이니까 가능할 법한 갖가지 이유들로 인해 월드컵에 못 나간 비운의 선수로 기억된다.

 

디 스테파노는 1946년 월드컵부터 1966년 월드컵까지 총 5번의 월드컵 도전을 했는데, 엽기적일 정도의 스토리를 겪으며 실패를 반복했다. 우선 1946년에는 세계대전으로 인해 월드컵이 열리지 않았으며, 1950년 월드컵에는 디 스테파노의 국가였던 아르헨티나가 불참했다. 또한 1954년 월드컵에는 갑자기 규정 영향을 받으며 이중 국적을 가지고 있던 디 스테파노의 월드컵 출전이 무산되었다. 이후 1958년 월드컵에는 역대 최강 소리를 듣던 스페인 국적으로 월드컵에 참여하려 했으나, 스페인이 지역 예선에서 탈락하는 대이변이 발생하고 말았다. 물론 이때의 스페인 전력은 4년 뒤인 1962년에도 유지되었으나, 이때는 디 스테파노가 개막전 직전 경기에서 부상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1966년 월드컵도 허리 부상 때문에 출전 자체를 하지 못했고, ‘월드컵 불운’ 그 자체의 커리어를 보내며 은퇴를 하게 되었다.

 

현대에 와서 재평가가 이뤄질 때, 만약 수많은 행정적, 정치적 틀의 안정화가 이뤄진 21세기에서 뛰었다면 디 스테파노는 얼마나 위상이 달라졌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편이다. 심지어 디 스테파노는 다양한 능력과 훌륭한 축구 지능에서 나오는 멀티 포지션 소화 능력마저 역대 최고로 뽑히는 선수 중 한 명이기에, 아마 현대축구가 요구하는 모든 부분에서 완성형에 다다른 선수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빅이어는 참 쉽게 타냈지만 각종 불운으로 월드컵에는 나서지 못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두 번째로 언급할 인물은 국적의 비운을 타고난 선수, 드라간 자이치다. 현대축구를 즐기는 팬들에게 “국적의 비운을 가지고 있는 선수가 누구인가요?”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아마 피에르에메릭 오바메양이나 라이언 긱스라는 대답이 나올 수 있겠지만, 필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드라간 자이치를 1순위로 뽑고 싶다.

 

드라간 자이치는 유고슬라비아 국가대표 무대를 통해 자신의 실력을 세계에 알렸으며, 자타공인 1970년대 초 최고의 윙어로 뽑히는 선수였지만, 유고슬라비아라는 국적이 그의 발목을 적지 않게 잡았다. 실제로 정치적 상황과 연관되어, 공산주의에 속하던 유고슬라비아는 선수들의 해외 이적을 차단했고, 드라간 자이치는 27세가 되어서야 프랑스 리그로 진출할 수 있었다.

 

현재 21세기의 유고슬라비아의 후신 국가들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이 있는데, 각 나라들의 선수들이 유럽에서 이름값을 떨치는 것을 생각해보면 드라간 자이치의 케이스는 더욱 안타깝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유고의 주장 드라간 자이치


마지막으로 언급할 인물은 커피하우스 축구의 낭만, 마티아스 진델라다. 우선 진델라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도대체 “커피하우스 축구가 뭐야?”라고 물을 수도 있는 사람들을 위해 미리 설명하고 가도록 하겠다. 우선 20세기 초반 오스트리아에게 있어서 커피하우스란 존재는 영국에게 있어서 펍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단순히 무언가를 마시는 공간이 아니라, 토론하고, 대화하고, 논쟁하는 장소이자 지식적인 진취를 목표로 수다를 떨던 그런 분위기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영국의 유명한 저널리스트 조나단 윌슨(Jonathan Wilson)은 오스트리아의 커피하우스 축구에 대해 영국과 다른 스타일로 축구를 해석할 수 있었던 까닭에 가깝게 언급하기도 했다. 즉 오스트리아가 전성기를 누렸던 20세기 초반은 커피하우스 축구의 낭만이 현실화된 것이자, 당연히 다뉴브 학파와도 연결되는 부분인 것이다. 마티아스 진델라는 이러한 오스트리아 축구사에서도 최고봉으로 꼽히는 선수이다. 위고 마이슬 감독의 분더팀-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일컫는 말-에서 활약한 진델라는 다재다능한 공격수의 끝판왕이라는 칭호에 걸맞은 역할을 수행해냈고, 왜 자신이 당시 분더팀의 핵심 선수였는지 입증했다.

 

하지만 특유의 지능적인 중앙유럽축구 스타일을 이끌었던 진델라는 1938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으로 인해 큰 영향을 받게 되었고, 1939년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며 나치 정권에 희생된 것이라는 음모론의 희생자로 지목당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조나단 윌슨(Jonathan Wilson)은 진델라의 죽음에 대해 그저 음모론일 뿐이라고 일축했으나, 정확한 사실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결국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과 진델라의 죽음은 커피하우스 정신의 종말을 고하는 사건이자, 동시에 다뉴브 학파가 세계로 뻗어나가며 많은 것을 입증하게 되자 그들의 철학은 혁신적이었고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것을 재평가하게 되는 사건이 되었다.

 

진델라는 분더 팀을 이끌었으나 자신의 조국 오스트리아는 안슐루스라는 치욕적인 일을 겪는다.


사실 이 글에서 언급된 세 명의 인물 말고도 축구사에서 시대적 배경에 희생당한 선수들은 여럿 있다. 스웨덴의 규정 상 국가대표에 출전하지 못했던 군나르 노르달이나, 야신 이후의 러시아 골키퍼 계보를 이었던 리나트 다사예프 등이 대표적일 것이다. 물론 이들에 대한 재평가가 속속히 이뤄지고 있다고는 하나, 정말 까다롭게 시대적 배경의 불이익을 받은 선수들은 제도적 요소나 환경적 요소를 하나하나 조명하지 않는 이상 재평가의 난이도가 상당한 축에 속하기에, 더욱 안타까울 뿐이다.

이처럼 스포츠에 있어서 평가란 개념은 떼어놓을 수가 없는 요소에 속한다. 이는 옛날로 갈수록 자료의 빈약이나 국가와 행정, 정치적, 시대적 배경들이 공존하며 불이익을 양산해냈던 상황들이 적지 않았던 터라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그래서 더욱 여러 가지 해석과 철학들이 맞부딪힌다. “옛날 선수들이 받았던 불리한 상대성을 보정해줘야 한다”나 “현대 축구 선수들의 상향 평준화된 전술 수행 능력을 더 인정해줘야 한다”등. 당장 무엇이 정답이라 말할 수 없겠지만 축구 철학이라는 것을 향해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칸트가 내놓은 3대 비판(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처럼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는 통일된 답이 일시적으로라도 제시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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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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