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아홉 개의 목숨을 가진 사업가’, 라스 빈트호르스트를 아는가? 바로 통일 독일에 혜성처럼 등장한 ‘독일의 빌 게이츠’에서 수차례의 파산을 경험한 ‘사기꾼’으로 전락한, 그러나 타고난 사업가 기질을 바탕으로 다시 한번 막대한 자본을 쌓아 올린 독일의 한 사업가이다. 현재는 스포츠 분야의 장래성을 알아보고 사업 영역을 확장해 국내 유명 스포츠 구단에 거금을 투자하고 있다. 빈트호르스트의 영향권에는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대표하는 클럽인 헤르타 BSC 또한 속해있다. 그가 보유할 수 있는 헤르타의 최대 지분인 49.9%를 보유하게 된 것이다.

 

독일의 명사업가 라스 빈트호르스트


헤르타 BSC의 대주주로 자리잡은 빈트호르스트는 구단 운영비로 한화 약 5000억의 거금을 투입하는 야심 찬 행보를 보였고, 이는 기존의 ‘전형적인 중위권 구단’ 이미지를 탈피하고자 한 구단의 비전과 맞아떨어졌다. 이처럼 빈트호르스트의 적극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헤르타 BSC는 2019/20 시즌 겨울 이적시장 ‘해당 시즌 겨울 이적시장 전 세계 최고 이적료 지출’ 및 ‘분데스리가 역대 겨울 최고 이적료 지출’라는 기록을 쓰며 분데스리가 및 유럽 축구계에 지각 변동을 일으키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후에도 헤르타 BSC는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도 레알 마드리드와 첼시 등 유구한 역사와 재정적 안정을 이룬 클럽을 만들겠다는 도약 프로젝트, 일명 ‘빅 시티 클럽 프로젝트’라는 이름을 내걸고 활발한 이적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헤르타 BSC는 결과에 지나치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여러 빅클럽들이 성공을 위해 수년 혹은 수십 년에 걸쳐 다져놓은 탄탄한 초석을 외면한 채 그들이 완성시킨 지붕만을 바라본 것이다. 그 결과 헤르타 BSC는 리그 상위권에 준하는 스쿼드를 구축했음에도 두 시즌 연속 강등권에서 허우적댔다. 결과론에 매몰된 광폭 투자가 도약이 아닌 퇴보를 불러온 것이다.

헤르타 BSC는 거대 자본 투입 이후 계속된 악순환을 타개하기 위해 감독 교체 카드를 수차례 꺼내들었지만,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었다. 헤르타 BSC는 현재 타이푼 코르쿠트를 새 사령탑으로 선임했고, 그의 휘하에서 총 5경기를 치르면서 2승 1무 2패를 기록했다. 감독 교체 효과로 승리에 대한 당장의 갈증은 해소됐지만,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전임 감독 팔 다르다이 시절과 다를 바 없기에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후반기를 잘 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렇다면 코르쿠트 감독은 남은 후반기를 무사히 보내기 위해 어떤 부분을 개선해야 할까?

 


하나. 헤르타 소속 선수의 색이 아닌 헤르타 자체의 색이 필요하다.

 

헤르타 BSC는 시즌 돌입 직전 여름 이적시장에서 마테우스 쿠냐, 도디 루케바키오, 욘 코르도바와 같은 기존의 공격진을 구성하던 선수들을 매각하고 수아트 세르다르, 스테판 요베티치, 마르코 리히터 등 공격적으로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자원들을 대거 영입하며 다득점을 향한 의지를 다졌다. 후반기에 막 돌입한 현재, 이적생인 요베티치와 리히터가 5골로 팀 내 최다 득점자로 군림하고 있다.

 

헤르타 BSC의 최다 득점자 스테판 요베티치


헤르타 BSC는 팔 다르다이 감독 집권 시기부터 역습을 주요 루트로 한 공격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코르쿠트 감독 또한 다르다이 감독이 정착시킨 팀컬러에 최소한의 변동만을 주기 위해 ‘카운터 어택’이라는 전체적인 틀은 유지하되 압박 지점 등 세부적인 전술 사항에는 변화를 주는 과정을 거쳤다. 따라서 선수들은 오밀조밀한 빌드업을 거쳐 공을 전진시키기보단 빠른 카운터 어택으로 상대방의 균열을 일으키는 플레이 방식에 더 익숙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활약상이 뛰어난 몇 명의 공격진을 필두로 한 카운터 어택 공격이 과연 효율성이 있는가에 대한 문제에는 의문부호가 달린다. 다르다이, 코르쿠트 감독이 고집한 공격 방식이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팀의 기대 득점 값을 보더라도 20.1점으로 리그 17위에 해당하는 수치를 기록하고 있으며, 팀 전체 득점 또한 21골로 매우 적은 편에 속한다. 이는 헤르타 베를린의 저조한 득점력과 미미한 화력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헤르타 BSC가 앓고 있는 득점력 빈곤의 근본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체계적인 틀의 부재’라고 할 수 있다.

 

헤르타 BSC의 기대 득점값과 전체 득점. 기대 득점은 17위, 전체 득점은 13위에 해당한다. (출처: Fotmob)


분데스리가의 특성상 수비라인이 높기 때문에 카운터 어택이라는 공격 방식은 잘만 사용한다면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헤르타 BSC의 카운터 어택이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선수 개인 능력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기 때문이다. 코르쿠트가 부임한 12월 가장 득점 가능성이 낮은 득점 10개 중 3개가 헤르타 BSC의 득점 상황이었는데, 이는 선수 개인의 슈팅 혹은 드리블 능력, 그리고 기적에 상당히 의존적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증이다.

팀의 공격을 이끌어갈 수 있는 선수가 있다는 것은 분명 고무적이다. 그러나 선수 자체가 팀 공격의 전체가 되어버린다면 그 팀의 공격은 단조롭고 방어하기 간편해질 것이다. 따라서 헤르타 BSC는 요베티치, 리히터 등 팀 내 가장 골 감각이 뛰어난 선수들을 주력으로 삼되, 그들의 능력을 극대화시켜줄 수 있는 헤르타만의 구조적으로 완성도가 높고 조직적인 움직임이 수반된 공격 패턴을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둘. 무질서한 수비라인은 빅 시티 프로젝트의 큰 걸림돌이다.

 

헤르타 BSC는 수비에서도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공을 소유하고 있는 상황, 그리고 그 반대의 상황에서 각각 문제점이 발견된다.

첫 번째 문제점은 공격의 답답함과 결부된다. 헤르타 BSC는 수비라인에서 상대에게 허점이 드러날 때까지 공을 돌리고, 후방에서부터 상대의 수비 블록을 타개하기 위한 작업을 전개하는 등 공격 지역 진출을 목표로 한 과정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러나 이때 거센 압박이 가해지면 별수를 써보지 못하고 소유권을 쉽게 내주는데, 제대로 된 공격을 펼쳐보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수비 국면에 임하게 되어버리니 크로스 혹은 컷백이 올라왔을 때 쇄도하는 상대 공격수에게 뒷공간을 허용하는 장면이 자주 확인된다. 그리고 이때 박스 안에서 대기하고 있는 선수에 대부분의 시선이 쏠리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 박스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선수에 대한 견제와 대인 마크는 소홀해지고, 그로 인해 중거리 슈팅을 많이 허용하게 되는 모습을 빈번히 확인할 수 있다. 이 악순환의 반복은 공격의 고착화를 야기함으로써 실점뿐만 아니라 득점 부분에서도 직접적인 악영향을 끼친다.

두 번째, 즉 공을 소유하지 않았을 때 노출되는 문제는 바로 ‘집중력 저하’이다. 헤르타 BSC의 수비진은 경기 시간이 흘러갈수록 집중력을 잃고 서서히 균열이 발생하는 경향이 짙다. 헤르타 수비진의 주축인 데드릭 보야타의 부진이 길어진 영향도 크다. 통계상으로도 38회의 실점 중 총 10회의 실점을 76분부터 90분 사이에 허용했을 정도로 체력적인 결함을 드러내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에는 세트피스 혹은 얼리 크로스 상황에서 뒷공간을 자주 내주면서 롱볼에 대해 취약점을 드러내고 있다.

 

76분 이후 가장 많은 골을 실점한 헤르타 BSC

 


결론

 

헤르타 BSC는 라스 빈트호르스트라는 큰 손을 등에 업고 야심 찬 계획을 세웠지만, 결과에 눈이 멀어 과정을 생략한 행보를 보여줬다. 분데스리가에서 내로라한 선수들로 스쿼드를 구성했음에도 챔피언스리그 진출권보다는 강등권에 더 가까운 성적을 계속해서 기록하며 현재까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공수 양면에서 부실한 경기력을 보이며 적극적인 투자에 상응하지 못하는 아쉬운 성적을 거두고 있기도 하다. 유럽 대항전 진출, 리그 상위권 도약 등 단기간 내에 빅클럽의 자질을 갖추는 것을 목표를 설정했지만, 거대 자본 투입 이후 반복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절단하는 것이 급선무다.

과연 소방수로서 부임한 코르쿠트 감독은 헤르타 BSC를 수렁에서 꺼내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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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성윤

종목을 불문하고 과거에 훌륭했던 선수를 현재 최고의 선수들과 비교하며 평가하거나 과거의 선수가 현재 활약하면 어떤 활약을 보여줄지 가정하는 것은 팬들에게 큰 재미를 준다. 다만 스포츠 자체가 순수하게 종목 내적인 부분뿐만이 아니라 종목 외적인 부분도 많이 가미될 수밖에 없으며 축구도 예외는 아니다.

 

이 때문에 축구사에서도 특유의 종목 외적인 부분에서 혜택을 본 자도 있으며, 반대로 불이익을 본 자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이 종목 외적인 부분은 과거와 현재의 기술 차이, 장비 차이 등으로도 해석할 수 있으나 이 글에서는 국적과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더욱 빛을 보지 못한, 혹은 21세기에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면 더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을 것 같았던 선수들을 알아보려고 한다.

첫 번째로 언급할 인물은 월드컵에 나가보지 못한 선수들 중 가히 역대 최고봉으로 뽑히는 선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다. 축구에 관심이 많은 팬들은 알고 있듯이, 디 스테파노는 정말 옛날이니까 가능할 법한 갖가지 이유들로 인해 월드컵에 못 나간 비운의 선수로 기억된다.

 

디 스테파노는 1946년 월드컵부터 1966년 월드컵까지 총 5번의 월드컵 도전을 했는데, 엽기적일 정도의 스토리를 겪으며 실패를 반복했다. 우선 1946년에는 세계대전으로 인해 월드컵이 열리지 않았으며, 1950년 월드컵에는 디 스테파노의 국가였던 아르헨티나가 불참했다. 또한 1954년 월드컵에는 갑자기 규정 영향을 받으며 이중 국적을 가지고 있던 디 스테파노의 월드컵 출전이 무산되었다. 이후 1958년 월드컵에는 역대 최강 소리를 듣던 스페인 국적으로 월드컵에 참여하려 했으나, 스페인이 지역 예선에서 탈락하는 대이변이 발생하고 말았다. 물론 이때의 스페인 전력은 4년 뒤인 1962년에도 유지되었으나, 이때는 디 스테파노가 개막전 직전 경기에서 부상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1966년 월드컵도 허리 부상 때문에 출전 자체를 하지 못했고, ‘월드컵 불운’ 그 자체의 커리어를 보내며 은퇴를 하게 되었다.

 

현대에 와서 재평가가 이뤄질 때, 만약 수많은 행정적, 정치적 틀의 안정화가 이뤄진 21세기에서 뛰었다면 디 스테파노는 얼마나 위상이 달라졌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편이다. 심지어 디 스테파노는 다양한 능력과 훌륭한 축구 지능에서 나오는 멀티 포지션 소화 능력마저 역대 최고로 뽑히는 선수 중 한 명이기에, 아마 현대축구가 요구하는 모든 부분에서 완성형에 다다른 선수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빅이어는 참 쉽게 타냈지만 각종 불운으로 월드컵에는 나서지 못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두 번째로 언급할 인물은 국적의 비운을 타고난 선수, 드라간 자이치다. 현대축구를 즐기는 팬들에게 “국적의 비운을 가지고 있는 선수가 누구인가요?”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아마 피에르에메릭 오바메양이나 라이언 긱스라는 대답이 나올 수 있겠지만, 필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드라간 자이치를 1순위로 뽑고 싶다.

 

드라간 자이치는 유고슬라비아 국가대표 무대를 통해 자신의 실력을 세계에 알렸으며, 자타공인 1970년대 초 최고의 윙어로 뽑히는 선수였지만, 유고슬라비아라는 국적이 그의 발목을 적지 않게 잡았다. 실제로 정치적 상황과 연관되어, 공산주의에 속하던 유고슬라비아는 선수들의 해외 이적을 차단했고, 드라간 자이치는 27세가 되어서야 프랑스 리그로 진출할 수 있었다.

 

현재 21세기의 유고슬라비아의 후신 국가들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이 있는데, 각 나라들의 선수들이 유럽에서 이름값을 떨치는 것을 생각해보면 드라간 자이치의 케이스는 더욱 안타깝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유고의 주장 드라간 자이치


마지막으로 언급할 인물은 커피하우스 축구의 낭만, 마티아스 진델라다. 우선 진델라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도대체 “커피하우스 축구가 뭐야?”라고 물을 수도 있는 사람들을 위해 미리 설명하고 가도록 하겠다. 우선 20세기 초반 오스트리아에게 있어서 커피하우스란 존재는 영국에게 있어서 펍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단순히 무언가를 마시는 공간이 아니라, 토론하고, 대화하고, 논쟁하는 장소이자 지식적인 진취를 목표로 수다를 떨던 그런 분위기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영국의 유명한 저널리스트 조나단 윌슨(Jonathan Wilson)은 오스트리아의 커피하우스 축구에 대해 영국과 다른 스타일로 축구를 해석할 수 있었던 까닭에 가깝게 언급하기도 했다. 즉 오스트리아가 전성기를 누렸던 20세기 초반은 커피하우스 축구의 낭만이 현실화된 것이자, 당연히 다뉴브 학파와도 연결되는 부분인 것이다. 마티아스 진델라는 이러한 오스트리아 축구사에서도 최고봉으로 꼽히는 선수이다. 위고 마이슬 감독의 분더팀-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일컫는 말-에서 활약한 진델라는 다재다능한 공격수의 끝판왕이라는 칭호에 걸맞은 역할을 수행해냈고, 왜 자신이 당시 분더팀의 핵심 선수였는지 입증했다.

 

하지만 특유의 지능적인 중앙유럽축구 스타일을 이끌었던 진델라는 1938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으로 인해 큰 영향을 받게 되었고, 1939년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며 나치 정권에 희생된 것이라는 음모론의 희생자로 지목당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조나단 윌슨(Jonathan Wilson)은 진델라의 죽음에 대해 그저 음모론일 뿐이라고 일축했으나, 정확한 사실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결국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과 진델라의 죽음은 커피하우스 정신의 종말을 고하는 사건이자, 동시에 다뉴브 학파가 세계로 뻗어나가며 많은 것을 입증하게 되자 그들의 철학은 혁신적이었고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것을 재평가하게 되는 사건이 되었다.

 

진델라는 분더 팀을 이끌었으나 자신의 조국 오스트리아는 안슐루스라는 치욕적인 일을 겪는다.


사실 이 글에서 언급된 세 명의 인물 말고도 축구사에서 시대적 배경에 희생당한 선수들은 여럿 있다. 스웨덴의 규정 상 국가대표에 출전하지 못했던 군나르 노르달이나, 야신 이후의 러시아 골키퍼 계보를 이었던 리나트 다사예프 등이 대표적일 것이다. 물론 이들에 대한 재평가가 속속히 이뤄지고 있다고는 하나, 정말 까다롭게 시대적 배경의 불이익을 받은 선수들은 제도적 요소나 환경적 요소를 하나하나 조명하지 않는 이상 재평가의 난이도가 상당한 축에 속하기에, 더욱 안타까울 뿐이다.

이처럼 스포츠에 있어서 평가란 개념은 떼어놓을 수가 없는 요소에 속한다. 이는 옛날로 갈수록 자료의 빈약이나 국가와 행정, 정치적, 시대적 배경들이 공존하며 불이익을 양산해냈던 상황들이 적지 않았던 터라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그래서 더욱 여러 가지 해석과 철학들이 맞부딪힌다. “옛날 선수들이 받았던 불리한 상대성을 보정해줘야 한다”나 “현대 축구 선수들의 상향 평준화된 전술 수행 능력을 더 인정해줘야 한다”등. 당장 무엇이 정답이라 말할 수 없겠지만 축구 철학이라는 것을 향해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칸트가 내놓은 3대 비판(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처럼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는 통일된 답이 일시적으로라도 제시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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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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